티스토리 툴바

 

93년 늦가을, MT 가던 길에 처음 보았던, 버스 안에서 실실 웃으며 이것저것 물어보던 선배. 메리야스보다 하얀 몸을 가졌다는 소문만 듣던(어디에선가 웃통을 벗었는데 메리야스가 안보였단다!). 1년에 한 번 동아리 창립기념회에 기분 좋게 나가면, 동아리방 청소 좀 하라며, 후배들에게 꾸지람 하고, 녹색평론 정기구독권으로 회비를 대신 내더니, 술한잔하면 [소금인형]의 후렴구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부르던 그 엽기적 행각에 이르기까지. 실체를 알 수 없던 한 선배.

 

그 선배는 93년 봄, 어느 정치조직 발족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내 모습을 보았다고 하니(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했다고 하니-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니-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마는), 얼추 요맘 때였을 것이다. 무성한 푸른 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그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반기던.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새벽에, 우리는 손잡고 기나긴 골목길도 한번 걸어보았으나, 여전히 얼굴보면 그저 반가운 선후배 사이로 15년을 보냈다. 멀리서 보는 그의 느낌은 그가 준 음악테이프와 CD에 실려있던 노래들의 느낌에 맞닿아 있었다. 자신이 나가던 음감에 데려갔을 때, 녹평의 강연회에서 만났을 때, 우리가 가던 길을 성실히 가면 언젠가 만나게 될 사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상했다. 도무지 친해지지 않는 뭔가의 거리감 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다니 말이다.

 

오늘로, 그의 이름을 알게 된지도 20년이 넘었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작은 집을 지었다. 친구이자 연인으로, 그리고 부부로서. 오늘은 그 작은 집의 기념일이다. 조촐한 언약식으로 결혼식을 대신한 우리들은, 어느날이 기념일인가를 두고 옥신각신 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의 기념일을 챙겨주겠다는 고마운 친구도 생겼다. 그만큼의 시간이 쌓여왔다.

                                                  

얼마 전, 불량기계 언니가 남편의 어떤 점이 좋으냐고, 어떤 점이 이 사람하고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냐고 물었을 때, 궁핍하게 떠오른 답이 타협이 될 수 있는 관계다, 같이 있는 게 좋다는 거였다. 솔직하게 말하긴 했지만 멋은 좀 없는 대답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때 미처 대답하지 못한 두 가지 일이 떠오른다. 하나는 밀양을 다녀오던 차 안에서 였고, 또 다른 것은 보름달이 뜬 밤에 용눈이 오름을 오르던 때였다. 나는 주변에 처리할 일이 많아질수록 개인적으로 침잠하는 습성이 있는데,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는 그의 모습은 내게 좋은 거울이, 때론 죽비가 된다. 밀양의 주민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드는 많은 다짐과 느낌 속에서,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시간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달빛이 아니면 그 어떤 불빛도 없어서, 왠지 연쇄살인범이라도 나올 것 같이 오싹하던 그 밤에 혼자였다면 오름의 등성이를 걷지 못했을 것이다. 오름 주변길은 너무나 어둡고 적막해서 그에게도 살짝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도 혼자서는 힘들고 나도 혼자서는 힘든 어떤 일이 함께 가능하다는 고마움과 든든함. 그 여운이 길다.

 

남편은 요즈음 허리가 아픈 나의 신음소리를 밤낮으로 들어가며, 설거지를 한다. 우리는 참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이제는 그 일도 그 시간도 참 보람되다는 뿌듯함이 인다. 건강하길. 그대.

 

dalit.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상식의 관점에서 당권파가 부정, 부실 선거의 주범일수 있다는 심증을 굳히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것은 비례대표 선거의 실체적 진실보다는, 오히려 지난 주말에 있었던 폭력사태였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저렇게까지 할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했겠는가라는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그리고, 오늘 프레시안에 올라온 홍세화씨의 글을 읽으면서 진료실에 앉아 환자분들을 호명하는 데, 목이 메이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간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내가 느꼈던 분노의 저번에 깔려있는 어떤 답답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의 글은 너무나 절절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이름뿐인 민노당 당원, 당비만 내고 겨우 어쩌다 모임에 나가 현상황에 대한 귀동냥이나하던 진보신당 당원이었기에, 믿었던 심상정과 노회찬씨가 다시 진보신당을 탈당해서 통합진보당으로 간다고 할때 갈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총선을 치르면서 남아 있길 잘했다는 확신을 했다. 진보신당 비례대표1번 청소노동자 김순자, 그리고 당선 안정권이었던 비례대표 2, 3번에 비정규직 노동자 대표 한사람이 없이, 이석기와 김재연이란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을 올려 놓은 통합진보당. 이 확연한 차이가 두 당이 어떤 종류의 당인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홍세화씨의 글을 읽으면서 지금의 이 사태는, 당권파 뿐만이아니라 지금까지 진보진영의 노력의 결과를 사유화하려했던 모든 세력들에게 근본적 책임이 있음을 본다.


언젠가 불량기계님이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은, 원전이 가져올 자연이나 환경파괴의 문제보다, 거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 주위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먼저 마음이 간다고. 나도 사실, 그 말에 말없이 동의했다. 만약,  전태일당이 출범한다면 난 기필코 거기에 내 부끄러운 이름을 올려놓아야겠다.

 

홍세화씨의 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510175808&section=01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어 오늘은 많이 모였네!

 

이게 많이 모인거야?

 

응. 어제는 스무명 정도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오백명은 되겠네.

 

-----------------------------------------------------------------------

 

 

                     

조금 늦게 도착한 게 아쉬워. 그래도 김제동 이야기 들은 건 좋았어. 8살 아이에게 다가가,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잖아. 의사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 아이에게 왜 의사가 되고 싶냐고 그가 물었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싶어서요. 그 아이 말처럼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대답해. 어른들도 그렇게 아이들을 꼬득이잖아. 그런데 막상 이 사회에서 아픈 이들은 외면을 당해. 아픈 이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적은 이 현실은 대체 뭘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김제동의 말처럼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싶은 건 우리 모두의 진실한 마음인데 말이야. 이념적 잣대로 매도하고 말이지. 마지막 그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 한 생애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로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 비난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의 생애를 걸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해서 김진숙씨 얘기하고 시낭송을 차분히 듣지 못한 것하고, 집회장 옆에 있던 추모 빈소에 가서 인사를 못 드린 것이 아쉽고 마음에 걸려. 빈소에 가서 보니 뭘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고 사람들이 사진을 계속 찍고 있어서 그냥 보고만 오고 말았네. 그리고 한 가지. 우리 춘천 녹색당 모임도 깃발이나 등에 붙이는 포스터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 녹색당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한데...

 

모금을 위한 특색 있는 행사도 재밌었지? 서민 교수가 기증한 회충 한쌍! 70년대를 풍미했던 기생충의 대표종.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박멸 박해를 받기도 했던... 부부금슬을 좋게 한다며 당당 투명봉지에 담아 기증하신 재기발랄함에 웃음이 터졌었네. 우리가 자릴 나설 때까지 팔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누군가 사갔으면 좋겠다.

 

오늘 행사는 슬픔을 공유하는 자리라기보다는, 결의를 다지고 즐겁게 떠들썩하게 재미있게 슬픔을 위무하는 자리였던 것 같아. 집에서 라면박스를 깔고 잤다는 그 아이도 이 자리에 나왔을까? 그 아이의 눈에는 오늘, 이 자리에 오고 싶었지만 오지 못했던 분들의 얼굴이 보이진 않을거야. 금요일 저녁이 일하는 피크타임이라 오지 못한 불량기계 누님,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 오지 못하신 산수유님, 연락을 늦게 받아서 서울에서 춘천으로 돌아오던 기차안에 있던 오후님, 그리고 금요일은 좀 쉬어야 된다던(^^) 여린두발(의 그렇지만 마음^^).  다음, 19일에는 범국민 대회에는 모두들 그 아이의 얼굴을 보러 갈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이곳 춘천에도 그 아이들을 잊지 않고 있는 깨알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 아이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힘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관심과 현금이래. 심리적 복지와 실질적 복지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지^^. 계좌번호 적어놓을까?

*쌍용차 희생자 범국민추모위원회 모금계좌: 신한 110-360-795902(예금주 김정우/쌍용차지부장)

*쌍용차지부 생계비 후원계좌: 농협 351-0156-5171-53(예금주 김남오/쌍용차지부 총무부장)

--------------------------------------------------------------------


아, 새벽이는 지금쯤 친구들과 재밌게 놀고 있겠지.

갈 때는 준가족이 될 듯하였으나, 올 때는 가족만 옆에 있드라...


새벽이 눈에 우리는 그저 한쌍의 바퀴벌레일 뿐이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 아이들이, 한참 투쟁할때, 연대하러 오신 분들중에 까만옷 입고 오신 남자분들한테, 가서 물어요. '아저씨 용역이지요. 우리아빠 때리지 마세요' 그걸 잠꼬대를 합니다. 아, 저는 우리 조합원분이 사진을 찍어서 트위터에 올린 걸보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게요.아들 놈이 여섯살인데 아빠가 노숙을 하니까 애들도 주말이면 와서 노숙을 하는데 집에 가서도 라면박스를 깔고 자는 거예요. 아빠가 밖에서 그렇게 자는데... 하면서"

 

" 아빠는 무급휴직자였어요. 1년 후에 복직시켜주겠다던 (회사의) 약속. 그 약속을 3년을 넘게 기다려왔던, 그러나 3년을 나날이 배반당해왔던. 아빠가 세상에 남긴건 만팔천원이 남아 있던 저금통장과, 쌍용차 작업복이 곱게 다려진채 시신옆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 이런 죽음이 스물두번째입니다. 어떻게 하면 스물세번째 사망자를 막을수 있을까요? 전, 이명박정권에서 그나마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가서, 우리가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않을테니까. 조끔만 더 버텨주십시요. (라고 얘기하는) 어쩌면 그것밖에 없는게 아닌가. 길이 멀더라도 한번씩 가보셨으면 좋겠어요. 저렇게 기를 쓰고 버티는 사람들, 기를 쓰고 살아볼려는 사람들. 살게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죠.."  ( 김진숙씨의 춘천 MBC 파업 지지 강연회 중에서.)  

 

 

 

 

 

(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MBC 파업 지지 강연회 녹음기록 1 & 2 )

 

 

 

 

부끄럽게도 간다 간다 하면서 한번도 가지 못했다. 쌍용자동차에 대한 김진숙씨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이 날까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 오늘 아내와 함께 서울 대한문에 가기로 한다. 가고 싶은 많은 분들을 대신해 가서 인사드리고 함께 슬픔을 나누고 올 예정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구럼비의 생명들

1+1=3 2012/05/07 15:21

 

 

 

어느새 사람들은 사물에 깃든 생명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생명을 장식품처럼 만들어버리기도 한다(위 사진처럼 말이다!). 어제 새벽이네 물물교환 하러 갔다가 [한나]님의 작품이 그려진 엽서를 받았다. 구럼비의 생명들이다. 그림 속에 움트고 있는 생명들에 시선이 머물러 한참 생각에 잠겼다. 한나님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보인다면 세상은 이렇게 파괴되지 않았을텐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 어제 오후님 생일파티 끝미에서  불량기계님과 외모 위주의 칭찬이 지니는 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사랑하는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잘생겼다는 칭찬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훈훈한 미덕이지. 그런데도 우리는 녹색당이니까 조금 더 얘기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야길 꺼내 봤다. 언제부턴가 어느 자리를 막론하고 외모 중심의 칭찬이 많아졌는데, 그런 분위기는 그 칭찬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다른 의미를 그리고 그 칭찬을 듣는 사람에게도 여러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행동의 방침)은 공유하지만 그 과정과 내용이 사뭇 다르셨던 불량기계님은 놀라운 인내력으로 내 억지 주장을 끝까지 잘 들어주셨다. 남편도 끝까지는 잘 안 들어주던데^^;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설명하셔서 내가 이야기를 하면서도 불량기계님에게 설득당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ㅋ). 아름다움이라...마음은 앞서지만 가물가물 도무지 잡히지 않는 이야기 주제다. 불량기계님은 집 앞에서 인사를 나눌 때, 논리가  조금 더 치밀해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내가 느끼는 것들이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인지 스스로 확실히 할 필요도 있고 지금부터 조금씩 정리하고 책도 좀 읽어야 겠단 마음을 먹었다. 그 첫 단추를 열어볼 겸 비몽사몽 [현대성과 현대문화],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 [고흐-영혼의 편지] 등의 책을 꺼내 보았다. 일단 드는 생각들 쭉 써보고 또 더 생각해보고 하면 외모주의를 대하는 내 불편한 감정들의 기원에 가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

.

 

나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배타적으로 누군가를 가리켜 잘생겼다거나 미인이라거나 하는 외모 관련 칭찬을 경계하는 편이다. 그것은 외모의 가치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사회에 대한 반감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아름다운 외모란 게 있긴 있지만 인간에겐 그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우리는 인간에게서 다른 면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자는 취지(를 진심으로 존중하지만)에서만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만큼은 종교적 신봉자에 가깝다. 아름다움은 정말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아름답게 느끼고 보느냐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대한 근원적 정서가 사람을 얼마나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존재감의 가치가 춤을 추는 그 아름다움의 영역에서 살아야 한다(벌거벗은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을 제외한다면 정녕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낙원추방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는 애매한 상대주의적 관점과 어떤 것이 더 아름답다는 평범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모두 넘어서게 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아름다움/추함으로 정의내려왔는가에 대한 역사는 현재의 아름다움을 둘러싼 담론을 재조명해준다. ‘우리 모두는 아름답다’라는 말보다는 ‘사실 우리 모두는 아름다웠다’라는 말이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기가 쉬울 것이다. 모두 아름답기 때문에 누구를 지칭해 예쁘고 잘생겼다고 하면 안된다는 논리는 전자에 가깝지만 후자의 이야기는 ‘그런데 지금은 왜?’라는 질문을 가능케 한다. 이는 일상적인 칭찬으로 사용하는 ‘귀족적이다’, ‘공주처럼 예쁘다’ ‘왕자님처럼 멋지다’는 말에 대해서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오래 전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서, 땅을 일구고 있는 농노의 얼굴을 염소로 표현한 중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그 옆에는 농민들의 얼굴 형태에 따라 여러가지 동물을 짝지어 놓은 관상학서의 한 페이지도 펼쳐져 있었다. 당시의 지배층들이 농노들의 얼굴과 인격에 동물을 투영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귀족이 보기에 농노들의 생김새는 더럽고 추할 뿐 아니라 인간적 품위도 상실한 반짐승에 가까웠던 것이다. 반면 르브르 지상의 전시실에 가득 펼쳐진 그림속 귀족과 영주들은 권력과 품위와 교양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까지도 독차지 한 존재들이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창백한 피부. 착취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그들의 복식체계와 보석들. 그런 외피를 지닌 자들이 아름다움의 위상을 차지했다. 지배-피지배의 부당성을 외치는 많은 사람들도 지배층의 속성들이 아름다움의 영토를 점령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게 되었다.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을 아름다움의 영역에 편입시킬 수 있었던 것은, 파괴적인 방식으로 그 영역에서 추방시킨 자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피지배층이 자신들에게 부재하는 특성들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데 동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고 굴종하는 자괴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정체성은 해체된다.


설혜심은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에서 서구 지배사회가 관상학을 통해 안으로는 자신들의 사회 내 계층 간의 차별을 만들어내고, 밖으로는 다른 문명권으로의 침략과 억압을 정당화시켜온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또한 나와 타자를 구별하고 타자에 열등한 동물적 속성을 부여하는 전통은 유럽사람에게 체화되고 문화적으로 전수되면서 역사상 수많은 희생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다. 그가 추적한 관상학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아름다움에서 추방되었던 농민들의 삶을 복원시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고흐가 그렇다. 그는 당위적으로가 아니라 정말 진실한 감정으로, 솔직하게 일하는 농민의 손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 사회의 귀족들은 그런 고흐의 그림마저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들은 고흐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그가 그린 농민들을, 그들의 저녁식사와 오래된 신발을 아름답다고 느껴본 적 없는 자들이다. 농민들이 흙묻은 장화를 신고 들어가 목을 축이는 선술집에 걸려있기를, 고흐가 그토록 원했던 그림들이 대리석으로 치장된 미술관에 유배되어 있는 것처럼 여전히 농민들은, 흙을 닮은 삶들은 모두 아름다움에서 소외되어 있다.


나는 현재의 아름다움이라고 다수가 주입하는 주류적 형상이 싫다(도무지 학습되지도 않는다). 그 이미지 속에서 이야기 속에서 ‘내’가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또 다른 내’가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 부당한 배제의 문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자괴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정당한 싸움에서 온다.


백인이 흑인보다 더 아름답다고 선언할 때, 흑인들은 그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 너희가 아름답긴 더 아름답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다른 가치가 있다가 아니라, “Black is beautiful”이라고 외쳤다. 우리는 타인을 마주할 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만 타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히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묻건데, 어찌 한 인종이 다른 한 인종보다 아름다운게 가능하단 말인가? 어찌 한 계급이 다른 계급보다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타인 앞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저 객체가 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본래 느끼는 자의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발굴해낼 뿐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실체가 없는 아주 유연하고 말랑한 영토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력은, 아름다움이라는 평등하고 탄력적인 가치마저, 편입과 소외의 역사로 만들어 버렸다.


‘문화는 특수한 민족, 집단, 계급, 시간 속에서 공유되고 있는 의미, 가치, 생활방식’이라는 헤르더의 정의는 이런 역사적 현실 앞에서 의미를 상실한다. ‘문화는 의미를 생산하는 실천이며 의미화하는 실천’이라는 개념이, 아름다움이 구조화되는 방식에 보다 적합하게 들어맞는다. 대중들이 전자의 문화개념을 따르고 인식할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은 끊임없이 의미를 생성시키며 타자들의 아름다운 영토를 잠식해왔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과 가치가 다수에 의해 (이미 혹은 자연스럽게) 공유된 것이라고 믿지만, 이 사회의 아름다움이란, 한쪽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계층과 인종과 성과 연령이 얽혀 각축을 벌이는 전쟁터의 전리품일 뿐이다. 이 치열한 싸움터에서 아름다움과 ‘나 자신’의 관계는 자긍심,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된다. ‘내게 없는 속성들’이 ‘내’게 침입하여 주인노릇을 하려들 때, 이를 막아내지 못하는 개인들은 고유한 존재와 시간이 소거되는 모멸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교활하고 기괴하게 생긴 백인들'에게서 자신들의 물리적&정신적 영토-빛나는 강과 형제자매의 얼굴과 오래된 이야기들과 바람에 깃든 영혼들-를 지키고자 했던 용맹한 인디언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전사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인종과 성과 가족으로 이어지는 정체성과 지나온 시간과 노동과 사랑하는 이들의 몸과 슬픔과 그리움. 그 모든 것들이 교차하는 지점 위에 피어오른 유일한 개체로서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침묵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아름다움에 대한 최소한의 경배일 것이니.

dalit.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개표방송을 보다가 참담한 심정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되면 작은 역전들이 있기를 애써 기대해보기도 했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켠 TV. 첫 장면은 지도 위에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진 처참한 풍경이었다.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결과. 8년전에 한나라당이 모조리 휩쓸었을 때 조차도 이렇게 참담하진 않았다. 정령 사람들은, 핵발전소를 세워도 좋고, 민간인 사찰을 해도 좋고, 강과 땅을 모두 파헤쳐도 좋고, FTA 체결로 이 땅 모든 것들에 값을 매겨도 좋단 말인가. 이런 것들쯤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인가. TV 앞에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게  남편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 네 명 중 한 명은 새누리당을 지지한다는 무서운 결과'라는 말을 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 '네 명 중 한 명'들끼리 모여 살면 안될까하고.  그들이 모인 곳에 송전탑도 세우고, 민간인 사찰도 듬뿍 받으시라 하고, 씨멘트 도배질된 인공 강가에서 자전거도 맘껏 타시고, 물에도 새소리에도 풀씨에도 모두 저작권료 지불하면서 값싼 체리는 많이 많이 드시라고, 제발 지들끼리 다 감당 좀 해달라고.  왜 국민국가라는 틀로 묶어서, 일생에 지지해본 적이 없는 정당과 온갖 부당한 정책의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가, 나는 무슨 죄인가. 그냥 1.1%와 0.5%가 만나서 작은 국민국가 하나 세우면 안될까. 이런 생각들을 말이다.

 

아이처럼 땡깡을 부리고 싶은 철 떠난 마음으로 학교 교정을 한바퀴 돌았다. 어느 나뭇가지에는 서리도 내렸지만 역시 연한 빛깔의 새잎들이 돋아 오르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봄은 오고 있었다. 얼마전 김종철 선생님 강연회 사회를 보다가 인용했던 글귀가 자꾸만 입에 올라왔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가면서도 항상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을 추위 속에 살아가지만 결코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을 잃지 않으며,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꺽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그때도 물론 선거 이후 녹색당이 해체되어야 할 위기에 마주할 것이란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뭐 언제는 따뜻했던 때가 있었나. 그래도 우리는 다시 초록의 싹을 틔워낼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게 우리 삶이 될 거니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은 막 서글프게 밀려온다.

 

다만 마음 끝자락에서 밀려오는 위안이 있다면, 늘 실천력이 부족하고 망설임이 많던 내가 현수막을 들고 공항과 거리에서 수줍지 않게 서 있을 수 있게 해준 사람들. 아침부터 저녁까지 춘천의 곳곳에서 녹색당 홍보를 하고 강연회 준비를 하고 포스터에 색칠을 하고 서울을 오가며 현수막을 만들고 함께 모여 밀양에 가고 생명버스를 타고 노래를 부르고 먹거리를 나눴던 사람들. 내 일생에 한 번쯤 꼭 만나고 싶었던 얼굴들. 그들이 모였고 또 다시 모일 것이라는 점이, 피얼룩진 땅 위에 살며 다시 의미있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뿐이다.  

 

dalit.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투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투표는 밥도 되지 못한다. 이것은, 귀에 못이 박히게 투표 거부할 자유를 얘기하는 김규항에게 배운 것이 아니다. 민주당과 노무현과 유시민과, 한명숙, 그리고 지금 강원도지사를 하고 있는 최문순에게 배웠다. 투표를 통해 바뀌는 것은, 그네들의 세상과 밥그릇일 뿐, 우리들의 세상은 아니었다. 강원 도청 앞 천막에서 농성하고 있는 골프장 반대 주민 분들을 뵙고 오던 날, 골프장 문제 해결하겠다고 웃으면서 자신있게 얘기했던 최문순 얼굴을 떠올리며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도지사 얼굴이라도 한번 보게 해달라고 수개월째 차디찬 아스팔트위에서 농성하고 있는 주민들을 그런 식으로 대할수는 없는 거였다.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합쳐야한다. 그것이 그들이 이 세상을 위해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남은 역할이다. 투표로 인해 무언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두 번의 경험이 있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방문했을 때와, 박원순이 지금 서울 시장으로서 펼치고 있는 정책을 보면서이다. 그 두 가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 나와 아내는 투표를 하고 왔다. 지지하는 정당의 존립을 위해 비례대표 투표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녹색당 당원인 아내는 진보신당 당원인 나에게 녹색당을 찍었냐고 자꾸 물었다. (왜 그럴까? 나는 아내에게 진보신당 찍었냐고 묻지 않는데^^)  나는 침묵으로 답했다. 새누리당과 통합민주당 후보의 선택지 밖에 없는 춘천의 상황에서 ‘더러운 놈 피하려고 너한테 찍는다. 먹고 떨어져라,’ 속으로 이런 얘기를 하며 국회의원 후보에게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언젠가는 이 곳 춘천에서도 그 두 정당 말고 정말 제대로 된 시민 후보를 꼭 한번 내고야 말겠다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내가 사는 춘천 석사동에 열병합 발전소가 들어온다고 하여 동네가 시끌하다. 물론 당연히 나는 열병합 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 우리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할 뿐만아니라 이 땅 어디에든 들어오는 것에도 반대한다. 하지만 과연 내가 춘천 지역에 열병합 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물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전기를 쓰는 것에만 익숙해있을 뿐, 내가 쓰는 전기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하지만 밀양에서는 송전탑 때문에 분신하신 어르신이 있었다.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해 생업을 뒤로하고 싸워야하는 삼척 주민들도 있다. 서울과 춘천 같은 도시에서 쓸 전기를 만들고 끌어다주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쓰는 놈 따로 있고 당하는 놈(죄송^^;;) 따로 있는 것이다. 컴퓨터를 켜고 불을 밝히고 세탁기를 돌리는 이 전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기를 만들어 내는 곳의 주민들은 끊임없이 방사능에 노출되는 공포에 시달려야하고 그 전기를 옮기는 송전탑 주변에 사는 분들도 전자파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야 한다. 송전탑 근처에 사는 노인 한 분은, 손자들에게 절대 집에 오지 못하게 하고 아무도 그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거기에 산다고 했다. 남을 위해서는 10원짜리 동전하나 내 놓는 것도 망설이는 게 세상인심인데 누구를 위해서 그런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가. 새벽까지 운동장만한 매장에 불을 밝히는 홈플러스를 위해서? 


우리가 여기 춘천에서 열병합 발전소를 반대하는 것이, 결국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된다면 차라리 여기에 발전소를 들어오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원래가 쓰는 사람이 피해도 함께 감내하는 것이 맞는 거다. 서울 사람들이 전기를 제일 많이 쓴다면 거기에 발전소를 짓는 것이 맞다. 홈플러스가 전기를 제일 많이 쓴다면 이건희 집 옆에다가 (세금을 써서라도^^) 화력발전소를 세워주는 것이 좋겠다. 그게 상식이다. 그렇게 못한다면 춘천 석사동만이 아니라 이 땅 어디에도 더 이상 발전소를 세우게 해서는 안 된다. 전기가 부족하면 불편하지 않냐고? 그 불편을 좀 감내하고 살자. 쓸데없는 소리나 해대는 TV 좀 끄고 일찍일찍 좀 자자. 동네상권 죽이며 새벽까지 장사해대는 대형마트 불도 좀 끄게 하자.


춘천의 주민들이, 춘천에 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면 삼척에 핵발전소가 들어오는 것도 반대해야 한다. 춘천에서만 싸울게 아니라 삼척의 싸움에도 함께 해 줘야한다. 밀양의 탈핵 희망버스에도 함께 가야한다. 밀양 탈핵버스에 갔을 때 주민분들은, 수도권에서 쓰는 전기를 끌어다 쓰기 위해 왜 우리가 평생을 일궈온 우리 땅에서 쫓겨나야하는가 물으셨다. 분신해서 돌아가신 이치우 할아버지의 노모는 아직도 아들이 돌아가신 것을 모르신다고 한다. 영정사진을 들고 생가를 들러보면서도,  90대 노모가 아들의 사망소식을 알게될까봐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슬픔앞에 정직하게 답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싸워야하고 싸울 수 있지만), 싸울 자격이 없다. 

 - ddaimo.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잊지 못할까봐 두려워질 때도 있으나 때론 잊혀지는 게 무서울 때도 있다. 어제 밤 밀양에서 돌아와서, 탈핵 희망버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TV를 켜고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웃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자려고 눈을 감으려니 다시 ‘할머니들은 내일 아침 또 비료 포대자루를 들고 꺽인 무릎을 끌고 그 높은 화악산 등성이의 움막으로 오르시겠구나.’하는 생각이나 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말, 춘천에 사는 벗들과 함께 다섯이서 밀양의 탈핵 희망버스에 다녀왔다. 저녁 7시가 약간 안되어 밀양에 도착했다. 아직 집회가 시작되지 않아 가볍게 김치찌개로 요기를 하고 강변에 모여 이치우 할아버지의 추모집회를 했다. 얼핏 보아도 3-4천명은 돼 보이는 숫자였다. 10시가 좀 넘어서 집회를 정리하고 마을 회관이나 주민 분들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오전에 마을 어르신들이 투쟁하고 있는 화악산 현장에 가서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한전에서 베어낸 나무들이 있는 자리에 영산홍을 심은 후 정리 집회를 했다.

 

                                                                                    - 정리 집회 때 하신 마을 분들의 얘기


평밭마을 이장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지난 6개월 동안 한전직원들의 쌍욕과 위협과 조롱을 받으며 이 움막을 지키는 동안 당신은 어디 있었는가’라고 묻지 않으셨다. 대신 먼 길 오셔서 너무나 고맙다며 우리가 묵은 숙소를 찾아와 일일이 손을 잡아주셨다. 할머니들은 ‘전기를 쓰는 사람은 대도시에 사는 너희들인데 왜 우리가 평생을 일구어 온 땅에서 쫓겨나야 하는가’ 묻지 않으셨다. 대신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우리가 먹을 음식을 준비해주시고 아침 식사로 따듯한 국밥 한 그릇씩을 주셨다. 정리 집회를 하고 떠날 때는 배고플 거라며 주먹밥에 김치를 준비해서 한 사람 한사람에게 나누어주셨다. 이장님은, 마지막 인사를 하시며 우리에게 큰절을 하시고 우리가 심어놓은 영산홍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들이 꼭 지키겠으니 당신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말씀하시며 와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셨다. 모두들 고개를 떨어뜨렸고 짜디짠 눈물이 화악산 검은 흙 위에 떨어졌다.


“ 할머니들이, 배운 분들이 많이 도와달라고 하시는 데, 저희가 배운 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위처럼]에 맞춰 율동을 했던 여학생 한 명이 이런 말을 하며 울먹였을 때 이 말에 들어 있는 마음의 무게 때문에 참으려고 해도 눈물이 났다. 우리가 해드린 게 무엇인가. 고작 휴일 이틀에 몇 시간을 달려온 것뿐인 데 수개월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싸움을 해오고, 같은 마을 사람이 분신해 죽는 참담한 시간을 함께 해드리지도 못했는데..   우리가 떠나면 또 이분들은 외롭게 이 움막과 컨테이너 박스를 지키며 싸워야 할 텐데.. 국밥 한 그릇 대접해 드리지도 못하고 떠나온 우리들을 향해 천군만마를 얻은 듯 웃으며 배웅해주셨던 어르신들.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옆으로, 이렇게나 많이 있었나 싶게 끝없이 이어지는 송전탑들을 보았다. 그 송전탑들은 모두 걸신들린 듯 전기를 잡아먹는 서울과 대도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 송전탑 바로 밑에, 어디 도망도 가지 못하고 붙박여 사는 엎드린 집들도 보았다. 다시금 어르신들이 묻지 않았던 질문들이 끝없이 마음속에 일어났다.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내 놓으라면 내 놓아야하고 나가라하면 찍소리 말고 나가야한다. 이 나라의 가진 자들이, 없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가혹한 철퇴를 나라고, 혹은 나의 가족이나 내 벗들이라고 피해갈수 있을까. 설사 피해갈 수 있다한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하다 한들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행복인가. 어디 대단치 않은 내 꿈이라도 이 나라에서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좀 다른 꿈을 꾸어야하지 않은가. 내가 처음 이 세상을 향해 짱돌을 들었던 1989년의 세상과 2012년의 세상은, 없는 사람들에겐 똑같았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내 생각만 바뀌었을 뿐. 사람은 나이를 시간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 태도로도 먹는다.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 데 나만 나이를 먹어 버린 것 같았다. 싸워야할 상대는 시대를 거슬러 가는 데 정작 싸워야할 사람들은 늙어만 갔다. 밀양을 떠나려 차에 오를 때 한 후배는 ‘참 슬프네요.’라고 했다. 모두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래.. 이 슬픔을 끝내 잊지 말자. 그러면 그 슬픔이 비추는 길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길 위에 내가 꾸어야할 새로운 꿈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밀양이 준 질문이고 내가 한 다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