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오후님 생일파티 끝미에서 불량기계님과 외모 위주의 칭찬이 지니는 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사랑하는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잘생겼다는 칭찬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훈훈한 미덕이지. 그런데도 우리는 녹색당이니까 조금 더 얘기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야길 꺼내 봤다. 언제부턴가 어느 자리를 막론하고 외모 중심의 칭찬이 많아졌는데, 그런 분위기는 그 칭찬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다른 의미를 그리고 그 칭찬을 듣는 사람에게도 여러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행동의 방침)은 공유하지만 그 과정과 내용이 사뭇 다르셨던 불량기계님은 놀라운 인내력으로 내 억지 주장을 끝까지 잘 들어주셨다. 남편도 끝까지는 잘 안 들어주던데^^;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설명하셔서 내가 이야기를 하면서도 불량기계님에게 설득당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ㅋ). 아름다움이라...마음은 앞서지만 가물가물 도무지 잡히지 않는 이야기 주제다. 불량기계님은 집 앞에서 인사를 나눌 때, 논리가 조금 더 치밀해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내가 느끼는 것들이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인지 스스로 확실히 할 필요도 있고 지금부터 조금씩 정리하고 책도 좀 읽어야 겠단 마음을 먹었다. 그 첫 단추를 열어볼 겸 비몽사몽 [현대성과 현대문화],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 [고흐-영혼의 편지] 등의 책을 꺼내 보았다. 일단 드는 생각들 쭉 써보고 또 더 생각해보고 하면 외모주의를 대하는 내 불편한 감정들의 기원에 가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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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배타적으로 누군가를 가리켜 잘생겼다거나 미인이라거나 하는 외모 관련 칭찬을 경계하는 편이다. 그것은 외모의 가치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사회에 대한 반감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아름다운 외모란 게 있긴 있지만 인간에겐 그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우리는 인간에게서 다른 면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자는 취지(를 진심으로 존중하지만)에서만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만큼은 종교적 신봉자에 가깝다. 아름다움은 정말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아름답게 느끼고 보느냐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대한 근원적 정서가 사람을 얼마나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존재감의 가치가 춤을 추는 그 아름다움의 영역에서 살아야 한다(벌거벗은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을 제외한다면 정녕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낙원추방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는 애매한 상대주의적 관점과 어떤 것이 더 아름답다는 평범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모두 넘어서게 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아름다움/추함으로 정의내려왔는가에 대한 역사는 현재의 아름다움을 둘러싼 담론을 재조명해준다. ‘우리 모두는 아름답다’라는 말보다는 ‘사실 우리 모두는 아름다웠다’라는 말이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기가 쉬울 것이다. 모두 아름답기 때문에 누구를 지칭해 예쁘고 잘생겼다고 하면 안된다는 논리는 전자에 가깝지만 후자의 이야기는 ‘그런데 지금은 왜?’라는 질문을 가능케 한다. 이는 일상적인 칭찬으로 사용하는 ‘귀족적이다’, ‘공주처럼 예쁘다’ ‘왕자님처럼 멋지다’는 말에 대해서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오래 전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서, 땅을 일구고 있는 농노의 얼굴을 염소로 표현한 중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그 옆에는 농민들의 얼굴 형태에 따라 여러가지 동물을 짝지어 놓은 관상학서의 한 페이지도 펼쳐져 있었다. 당시의 지배층들이 농노들의 얼굴과 인격에 동물을 투영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귀족이 보기에 농노들의 생김새는 더럽고 추할 뿐 아니라 인간적 품위도 상실한 반짐승에 가까웠던 것이다. 반면 르브르 지상의 전시실에 가득 펼쳐진 그림속 귀족과 영주들은 권력과 품위와 교양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까지도 독차지 한 존재들이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창백한 피부. 착취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그들의 복식체계와 보석들. 그런 외피를 지닌 자들이 아름다움의 위상을 차지했다. 지배-피지배의 부당성을 외치는 많은 사람들도 지배층의 속성들이 아름다움의 영토를 점령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게 되었다.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을 아름다움의 영역에 편입시킬 수 있었던 것은, 파괴적인 방식으로 그 영역에서 추방시킨 자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피지배층이 자신들에게 부재하는 특성들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데 동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고 굴종하는 자괴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정체성은 해체된다.
설혜심은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에서 서구 지배사회가 관상학을 통해 안으로는 자신들의 사회 내 계층 간의 차별을 만들어내고, 밖으로는 다른 문명권으로의 침략과 억압을 정당화시켜온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또한 나와 타자를 구별하고 타자에 열등한 동물적 속성을 부여하는 전통은 유럽사람에게 체화되고 문화적으로 전수되면서 역사상 수많은 희생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다. 그가 추적한 관상학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아름다움에서 추방되었던 농민들의 삶을 복원시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고흐가 그렇다. 그는 당위적으로가 아니라 정말 진실한 감정으로, 솔직하게 일하는 농민의 손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 사회의 귀족들은 그런 고흐의 그림마저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들은 고흐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그가 그린 농민들을, 그들의 저녁식사와 오래된 신발을 아름답다고 느껴본 적 없는 자들이다. 농민들이 흙묻은 장화를 신고 들어가 목을 축이는 선술집에 걸려있기를, 고흐가 그토록 원했던 그림들이 대리석으로 치장된 미술관에 유배되어 있는 것처럼 여전히 농민들은, 흙을 닮은 삶들은 모두 아름다움에서 소외되어 있다.
나는 현재의 아름다움이라고 다수가 주입하는 주류적 형상이 싫다(도무지 학습되지도 않는다). 그 이미지 속에서 이야기 속에서 ‘내’가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또 다른 내’가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 부당한 배제의 문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자괴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정당한 싸움에서 온다.
백인이 흑인보다 더 아름답다고 선언할 때, 흑인들은 그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 너희가 아름답긴 더 아름답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다른 가치가 있다가 아니라, “Black is beautiful”이라고 외쳤다. 우리는 타인을 마주할 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만 타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히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묻건데, 어찌 한 인종이 다른 한 인종보다 아름다운게 가능하단 말인가? 어찌 한 계급이 다른 계급보다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타인 앞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저 객체가 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본래 느끼는 자의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발굴해낼 뿐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실체가 없는 아주 유연하고 말랑한 영토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력은, 아름다움이라는 평등하고 탄력적인 가치마저, 편입과 소외의 역사로 만들어 버렸다.
‘문화는 특수한 민족, 집단, 계급, 시간 속에서 공유되고 있는 의미, 가치, 생활방식’이라는 헤르더의 정의는 이런 역사적 현실 앞에서 의미를 상실한다. ‘문화는 의미를 생산하는 실천이며 의미화하는 실천’이라는 개념이, 아름다움이 구조화되는 방식에 보다 적합하게 들어맞는다. 대중들이 전자의 문화개념을 따르고 인식할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은 끊임없이 의미를 생성시키며 타자들의 아름다운 영토를 잠식해왔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과 가치가 다수에 의해 (이미 혹은 자연스럽게) 공유된 것이라고 믿지만, 이 사회의 아름다움이란, 한쪽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계층과 인종과 성과 연령이 얽혀 각축을 벌이는 전쟁터의 전리품일 뿐이다. 이 치열한 싸움터에서 아름다움과 ‘나 자신’의 관계는 자긍심,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된다. ‘내게 없는 속성들’이 ‘내’게 침입하여 주인노릇을 하려들 때, 이를 막아내지 못하는 개인들은 고유한 존재와 시간이 소거되는 모멸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교활하고 기괴하게 생긴 백인들'에게서 자신들의 물리적&정신적 영토-빛나는 강과 형제자매의 얼굴과 오래된 이야기들과 바람에 깃든 영혼들-를 지키고자 했던 용맹한 인디언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전사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인종과 성과 가족으로 이어지는 정체성과 지나온 시간과 노동과 사랑하는 이들의 몸과 슬픔과 그리움. 그 모든 것들이 교차하는 지점 위에 피어오른 유일한 개체로서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침묵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아름다움에 대한 최소한의 경배일 것이니.
dalit.